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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1장 기독교적 정신과 식이


1장 기독교적 정신과 식이

 

크리스찬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매일 우리는 우리 동료 인간들과 인간이 아닌 다른 창조물들과 우리 주위의 세상의 실체들에게 영향을 주는 결정을 끊임없이 한다. 많은이들은 이러한 선택들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개인적인 습관과 우리의 문화적인 관습들을 이용하여 자신의 삶을 결정하곤 한다. 습관과 관습은 편안하게 답변을 끌어내는데 그것은 종종 옳다는 느낌을 주고 다른이로 부터 비난받는 경우가 드믈기 때문이다. 기독교정신은 우리에게 우리의 모든 중요한 선택들이 신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알아보도록 요구한다. 법적으로 인정되고 종교적 권위자에 의해서도 인정되었지만 어떤 행위들은 옳지 않을 수 있다. 신이 우리가 하도록 원하는 것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 물론, 크리스찬은 성경을 찾는다. 나는 우리가 깊은 신앙심과 열린 가슴으로 성경을 볼 때 식물에 기반한 식이를 강력히 지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The Bible

 

성경은 우리 삶을 위한 신의 교과서이다. 때때로 크리스찬은 어떤 사항에 대해 성경이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의 현재의 상황을 고려하고 성경을 읽도록 요구된다. 그리고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 기도한다.

 

시간이 지나 아마도 성령의 도움과 함께 사람들은 논란되는 이슈들에서 신의 의지의 위대한 이해를 얻게 될 것이다. 한때 신실한 크리스찬들은 성경이 노예제도를 부여했다고 생각하였고 그 근거로 창세기 9장, 디도서 2장, 베드로전서를 들었다. 하지만 오늘날 크리스찬들은 노예제도가 연민, 자비, 정의의 기본적인 성경원리에 어긋난다는데 대해 한결같이 동의한다.

 

성경해석의 어려움과 우리 인간의 한계들을 주의깊게 감안하고, 우리는 식이를 포함한 모든 문제들에서 신의 의지에 대해 주의 깊게 물음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먹는 것으로부터 금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비난 없이 사람들이 동물을 먹는것에 대한 많은 장면들이 있다. 게다가 루가 복음 24:43 은 예수가 생선을 먹는것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성서시대의 삶은 어려웠다. 식품은 때때로 부족하였다. 많은 사람들에게서 고기의 절제는 위험한 실천임을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유목민들이나 물가에 사는 사람들처럼 전통적으로 생계를 고기에 의존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러하였다. 헤브루인들은 유목 양치기들이었고 식품이 모자라던 당시에는 채식주의가 위험할 것이었다.

 

고기를 먹는것이 본래부터 죄가 아니었다 할지라도, 세계의 심각한 문제들에 기여하는 오늘날의 육식문화는 모든 크리스찬에게 윤리적인 관심을 일으키고 있다. 이 책에서 우리가 보게 될 것과 같이 고기중심의 식이는 심각한 환경오염과 우리의 육체에 해를 입히며, 지구적인 빈곤을 유지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신의 창조물들을 끔찍하게 다루도록 이끈다.

 

그러나 성경은 채식주의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채식주의”라는 용어는 200년전에 고안되었다. 그러나 성경은 현대의 고기산업을 지지하고 있는 집중적 또는 공장식 농장과 모든 공포들이 등장하기 전에 인간이라는 존재를 위한 신의 첫 번째 선택으로서의 식이를 서술하고 있다. 사실 창세기는 신이 아담과 모든 동물들에게 식물성 식이를 먹도록 가르치는 것과 함께 완전한 비폭력으로서 에덴동산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보라, 나는 너에게 씨를 맺는 모든 식물과 열매 속에 시를 맺는 모든 나무를 준다. 너는 그것들을 음식으로 하라. 그리고 땅위의 모든 동물들에게, 그리고 ...숨을 쉬는 모든 생명체들은 모든 푸른 식물을 음식으로 준다(창세기 1:29-30).”

 

신은 그런 다음 이들 채식인 창조물을 재음미하고 그것이 ”매우 좋음(very good)“을 발견한다. 앤드루 린제이 박사처럼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창조물들이 신을 위한 것이지 어떤것에서 주장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인간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 동의한다. 창세기 1장 28절에 서술되어진 것은 사실이다.

 

“신이 그들에게 말씀하시길 ‘열매 맺고 번성하라, 그리고 지구를 채우고 그것을 정복하라. 그리고 물의 물고기들과 하늘의 새들, 땅위에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들을 지배하라.”

 

그리고 바로 그 다음절은 인류에게 단지 식물을 먹도록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류의 지배는 신성한 책임이 되어야 한다고 이해한다. 인간들은 지구와 그 거주민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신의 창조물들에 대한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함을 요청받은 것이다. 신의 의도가 무엇이든 우리는 성경 속에서 압박과 학대를 포함하는 개념으로서 “지배”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창세기 2장은 인간과 동물들이 상호 호혜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서술한다. 창세기 2:18-19은

 

“그런 다음 주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홀로 있는것은 좋지 않다. 나는 그를 위해 그에 적합한 도울자(helper)를 만들것이다.”

 

그런 다음 신은 동물들을 창조하였다. 이 구절에 따른다면 동물들은 아담의 동료, 조력자로써 이지 음식으로써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이 아담과 이브를 에덴에서 쫓은 후에 음식은 더 이상 쉽게 구해지지 않았다. 아담의 어떤 후손들은 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 라는 믿음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성경은 신이 동물의 살을 소비하는 것을 홍수 이후에야 노아에게 명백히 허용하는 것을 서술하였을지라도 말이다. 물론 홍수 직후에는 제한된 식물만이 있었다. 그리고 노아의 가족들은 동물의 살을 먹어야 하는 필요를 가지고 있었다. 창세기 9:2-4에서 노아가 동물을 먹는 것을 허락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모든 노아의 후손들이 고기를 먹도록 요구되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은 사람의 육식 이후로부터 인간과 동물 사이에 증오와 투쟁, 원한이 있을 것이고 그 속에서 살게 될 것이라고 서술한다.   

 

이것이 고기를 먹는것에 대해 지불해야 하는 무거운 댓가이다. 그리고 많은 채식인들은 그들의 식이가 그들에게 동물들과 신의 나머지 창조물과의 사이에 친교와 평화의 위대한 의미를 부여함을 고마워한다.

 

에덴동산의 시간과 시간의 끝 사이에 있는 이들 중간시대 동안의 힘든 삶은 인간들이 동물들을 노동과 식품으로 착취할 필요성을 나타낸다. 분명히 고대의 헤브루인들은 때때로 동물을 해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과 전통은 고통을 최소화하고 잔인함을 금할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코셔(kosher)도살은 냉동하는 방법이 이용되기 이전에 흔히 행해졌던, 고기로써 동물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동물을 살아있는 채로 유지하고 상처부위를 치료하고 동물의 사지를 절단하는 것을 금지했다. 코셔도살은 도살되기 전에 동물들이 기절되어 있어야 한다. 목의 경동맥을 한번에 잘라야 하고, 동물의 살의 어떤 부분이 소비되기 전에 동물은 죽어있을 것이 요구된다. 만약 절단이 급속한 죽음을 이루어내지 못하거나 만약 칼날이 흠이 있다면, 동물은 고통을 겪게 되고 그 고기는 사람이 먹을 수 없게 된다. 유태인 법은 안식일이라 할지라도 상처입거나, 배고프거나 갈증 난 동물을 돕도록 요구한다.

 

동물을 돌보는 신의 몇가지 가능한 이유들을 성경에서 식별할 수 있다. 그러나 있음직한 설명은 대부분 번역상에서 누락되어졌다. 헤브루 경전은 인간과 동물들은 같은 본질(essence), nephesh를 가지고 있다고 서술한다. 성경의 창세기 번역은 사람에게는 "soul","being"로 번역을 해놓았고 동물들에게는 "creature"로 해 놓았다. 전도서의 작가는 동물의 사람의 유사한 본질을 인식하였는데, 모든 존재의 공통적인 운명을 서술한다. “모든 것은 한곳으로 간다. 모든 것은 먼지로부터 오고 다시 먼지로 돌아간다. 누가 사람의 영혼이 위로 가고, 동물의 영이 땅으로 가는 것을 알겠는가?(3:20-21)”

 

인간과 동물 모두의 존재인 nephesh는 불멸로서 동물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다(계시록 5:13). 그리고 성경은 신이 동물을 보호함을 단언한다(시편 36:6, 에베소서 1:10, 골로새서 1:20). 성경은 모든 상황에서 동물을 착취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동물들에게 연민과 염려를 보일 것을 고취시킨다. 사실 성경은 신이 아담을 신의 모상을 따라 만들었음을 서술한다. “신의 이미지에 의해 창조되어진”이라는 의미는 분명 물리적인 속성만을 언급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이 신의 사랑과 연민을 반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함을 나타낸다.

    

창세기 1장, 2장에 의하면 에덴 동산에서는 어떤 창조물도 다른 창조물을 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경은 이후에 우리에게 신의 이상이 비폭력과 채식인임을 상기시킨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올 때 에덴에서와 같은 존재들로 회복될 것임을 예언한다. 이 완전한 세계에 모든 동물들은 이사야가 서술한 것처럼 다시 채식으로 돌아갈 것이다.

 

“ 이리가 어린양과 거닐고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울 것이며, 송아지와 어린사자와 살찐 동물이 함께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 그리고 사자는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다. 그들은 나의 성스러운 산에서 해치거나 상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바다를 덮는 물과 같이 주의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이다(11:6-7,9).

 

신에 대해 이야기 하는 호세아는 비슷한 평화스러운 광경을 언급한다. 

 

“나는 들판의 동물들과 하늘의 새들 그리고 땅위의 기어다니는 것들과 너희를 위하여 그날의 계약을 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활과 칼과 땅으로부터 전쟁을 폐지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너희를 평안히 눕게 할 것이다(2:18)”

 

중요하게도 호세아는 신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들과 평화의 계약을 하였음을 서술한다. 이사야와 호세아의 상상은 묵시록의 저자와 유사하다. 그는 시간의 끝에 하늘나라가 땅으로 내려올 것이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임을 상상한다(21:4).

 

다시한번 언급하건대, 우리는 성경이 다른방법으로 동물들을 이용하거나 동물들을 먹는것을 명백히 반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은 인간의 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어떤 시간이나 어떤지역에서 어떠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고기를 요구할 수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서구의 그리스찬들은 동물을 단지 기호의 만족을 위해 동물들을 소비하는데, 이것은 성경의 이상과 모순되는 것이다. 마치 노예 소유주들이 한때 특정한 성경구절이 자신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듯이 자기만족적으로 개인적으로 성경구절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신의 창조물들의 선량한 양치기가 되어야 함이 반복적으로 되풀이되어 성경의 주제가 되었음을 환기한다. 만약 가능하다면 채식식이를 따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크리스찬의 전통

 

크리스찬의 전통은 넓은 범위의 정치적인, 사회적인, 역사적인 힘들에 반응하여 지난 2000여년간 진화해왔다. 예를 들자면, 예수사후 첫 1세기동안 매우 다양한 분파들이 예수의 삶을 다르게 해석했었다. 이들 초기교회 지도자들은 경쟁 분파들의 이단을 공공연히 비난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과적으로 교회의 전통들과 가르침들은 초기의 논쟁들과 각 분파들속에 반영되어졌다. 크리스찬 전통은 식이에 대해 어떻게 알리고 있는가? 지난 1900년간 대부분의 크리스찬들은 고기를 먹어왔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초대교회의 많은 크리스찬들은 채식인들이었다. 유태인 크리스찬을 포함한 몇몇 초기 크리스찬 그룹들은 채식인들이었다. 예수의 첫 번째 추종자들로 구성되었던 유태인 크리스찬들은 고기먹는 것을 금하는 것으로써 예수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결론적으로 기원 1세기의 유태인 크리스찬 분파들은, 나사렛교도(Nazarenes), Ebionites, Elchasaites 그리고 Ossaeans, 은 채식주의의 신봉을 계속해 나갔다. Manicheans들과 같은 많은 영지주의자(Gnostics)들과 영지주의 그룹들이 또한 채식인들이었다.

 

제임스(예수의 형제)는 채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고대문헌들은 마태오와 모든 사도들 또한 동물을 살을 금하는 채식인이었음을 서술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오리겐, 베이질, 나사렛의 그레고리, rnobius, 사막의 교부들(Desert Fathers), John Chrysostom, Jerome, 그리고 Tertullian 를 포함한 많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채식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크리스찬 정신이 채식주의를 강제한다고 믿지는 않았으나 4세기 경에 크리스찬 채식인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인식하면 채식주의가 널리 퍼져있음을 알수 있다.

 

 

중세에 Bogomils은 초기 Manicheans들과 흡사한였는데, 또한 채식인들이었다. 유사하게도 Albigensians들은 하나의 이상으로써 채식을 옹호하였다. 보다 최근에 몇몇 크리스찬 지도자들이 채식주의를 수용하거나 고취하고 있다. John Wesley(감리교 창립자), 엘렌 화잇(제 7일 재림교의 창립자), William과 Catheine Booth(구세군 창립자), 그리고 알버트 슈바이처. 19세기에 수많은 성서 크리스찬 분파들이 영국과 미국에 첫 번째 채식인그룹들을 설립하였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크리스찬 채식인들 중에는 레오 톨스토이, 건강계몽가 존 켈로그박사(콘 플레이크를 만듦), 실베스터 그레엄(그레엄 크래커를 만듦), Fred Rogers(TV쇼로 널리 알려져 있음).

 

식이는 언제나 크리스찬 사이에 꾸준한 이슈로 있었다. 바오로의 로마인들에 보낸 서신(14:1-2, 19-21)에서는 부분적으로 그의 고기를 먹는 추종자들과 채식을 하는 유태인 크리스찬 사이에 긴장이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결국, 비채식인 카톨릭 교회가 로마제국의 지원에 힘입어 기독교계를 점령해버렸다. 채식이 초기 크리스찬의 이상이었음에도 교회는 종종 채식이 이단임을 선언한다. 사실 교회가 Albigensians들을 공격한 시기에 군인들은 동물들을 죽이거나 먹는것을 거부하는 사람을 구별함으로써 이단을 찾아냈다. 물론 카톨릭 교회는 일관되게 채식을 반대하지는 않고 있다. 몇몇 지도자들은 채식을 요구하거나 북돋우고 있다. Benedictines, Carthusians, Carmelites, Dominicans, 그리고 Trappists이 대표적 예이다.

 

중요한 크리스찬 전통은 지나친 방임을 피한다. 진실과 선한 행위들은 동물을 살을 갈망함으로써 얻는 만족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바오로는 다음과 같이 썼다.

 

“신의 왕국은 먹는것과 마시는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정의와 즐거움이다(로마서 14:17)”

 

바오로는 일반적으로 채식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기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고 여러분의 형제를 넘어뜨리는(실족케하는) 어떠한 행위를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로마서14:21).

 

유사하게 바올은 쓴다.

 

“그러므로 만약 음식이 나의 형제들을 실족케하는 원인이 된다면, 나는 결코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며 나는 나의 형제를 실족치 않도록 할 것입니다(고린도 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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