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2&aid=0002002417
[프레시안 books] 찰스 패터슨 <동물 홀로코스트>
[최훈 강원대 교수] 미국의 동물 운동 단체인 '동물을 인도적으로 대우하는 사람'(PETA)은 가장 영향력 있는 동물 운동 단체로 꼽히지만 의도적인 구설수로 언론에 자주 오르내린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겠다"라며 여성들이 옷을 벗은 채 광고를 찍거나, 채식을 홍보하기 위해 역시 여성들이 채소로 주요 부위만 가린 채 거리를 행진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 단체는 동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여성을 성적으로 이용하는 홍보 수단을 지속적으로 이용하고 있고 그 점에서 비판도 꾸준히 받는다.
이만큼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논란이 된 홍보는 2003년의 '당신 밥상 위의 홀로코스트'(Holocaust on your Plate)라는 전시회이다. 큰 광고판에 홀로코스트 희생자들의 사진들과 공장식 농장의 사진들을 나란히 보여 준다. 가령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에 빼곡하게 수용되어 있는 사진과 대량 사육되는 양계장의 사진을 나란히 보여 준다든가, 켜켜이 쌓여 있는 유대인 주검의 사진과 역시 켜켜이 쌓여 있는 죽은 돼지들의 모습을 나란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1938년과 1945년의 7년 동안 1200만 명의 사람들이 홀로코스트에서 사라졌다. 미국에서만 4시간마다 같은 수의 동물들이 먹을 것이 되기 위해 죽는다"라는 문구도 있다.
이 전시회는 익명의 유대인의 기부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홀로코스트에서 친척을 7명이나 잃은 유대인에 의해 기획되었지만, 유대인이나 홀로코스트 추모 단체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악의에 의해 이루어진 반인류적인 유대인 학살을 의도가 전혀 다른 동물 살생과 비교하는 것은 어처구니없고 혐오스럽다는 것이다. PETA는 2006년에는 동물 학대를 흑인 노예제와 비교하는 전시회를 열었다. 이번에는 백인들이 흑인들을 폭행한 후에 목을 매단 사진과 사람들이 소를 도살한 후에 매단 사진을 나란히 보여 준 것이다. "동물은 새로운 노예인가?"라는 슬로건과 함께. 이 전시회도 흑인들의 분노를 샀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홀로코스트와 동물 학살 비교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대인 작가로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아이작 싱어가 이미 인간이 동물을 다루는 '나치'식의 방식에 주목했다.
인간이 아닌 무수한 생명체들은 단순히 인간에게 음식과 가죽을 제공하고자 창조되어, 고문당하고 학살당하지. 동물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람은 나치다. 그 관계는 동물들에게는 영원한 트레블링카이다. (17쪽)
이 중 "동물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람은 나치다"라는 말은 '당신 밥상 위의 홀로코스트'의 슬로건이 되었다. 트레블링카는 아우슈비츠와 함께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대표하는 곳이다. 홀로코스트 연구가인 찰스 패터슨이 쓴 <동물 홀로코스트>(휴, 2014년 8월 펴냄)의 원서 제목이 바로 '영원한 트레블링카'(Eternal Treblinka)이다. 폴란드 트레블링카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은 끝났지만 그와 비슷한 동물 학살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뜻일 게다.
▲ 2003년에 열린 '당신 밥상 위의 홀로코스트' 전시회는 유대인이나 홀로코스트 추모 단체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당시 전시됐던 사진 일부를 살펴볼 수 있는 한 웹 사이트 화면 갈무리). ⓒ http://thesocietypages.org
놀랍도록 닮은 공장식 농장의 동물 학대와 나치의 유대인 학살
동물의 권리가 그리 익숙하지 않고 동물 운동도 그리 활발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희한하게 동물권 관련 책들이 꾸준히 번역되어 나오고 있는데, <동물 홀로코스트>는 현대의 공장식 농장에서 벌어지는 동물 학대가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지 보여 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3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먼저 1부는 인간이 동물을 노예화한 역사와 차별 받는 사람을 동물에 빗대어 비하하는 관행들을 보여 준다. 그다음 2부에서는 산업화된 공장식 농장에서 동물 학대가 얼마나 잔인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서술하는데, 이것은 이미 20세기 초에 쓰인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부터 최근의 게일 A. 아이스니츠의 <도살장>까지 생생하게 그리고 있으므로 동물권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다만 공장식 농장의 산업화된 사육 및 도축 공정과, 나치의 유대인 수용과 학살 과정 사이의 유사성이 그토록 대단하다는 것에 놀랄 따름이다. 비좁은 공간에서 대량으로 사육(수용)되는 모습, 도살장(수용소)으로 이송되는 과정, 도살(학살)되는 신속한 시스템, 다우너(병자)를 처리하는 방법, 좋은 종자(인종)을 골라내기 위해 이루어지는 우생학(단종)까지 소스라치게 놀라운 공통점을 보여 준다.
실제로 자동차 제조업자 헨리 포드는 <정글>의 무대가 된 시카고 도축장을 보고 일관식 조립 라인을 개발했다. 포드는 반유대주의자이기도 한데, 히틀러는 포드를 극찬했다. 저자는 포드가 도살장에서 영감을 받은 일관식 조립 라인에서 히틀러가 인간 도살장을 생각해 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미국과 독일이 현대 문명에 기여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도 기여이다.
20세기 동안 현대 산업국가 중 두 나라인 미국과 독일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과 수십 억의 다른 생명체들을 도살했다. 두 나라는 금세기의 대학살에 각각 독특한 기여를 했다. 미국은 현대 사회에 도살장을 제공했다. 나치 독일은 가스실을 제공했다. (153쪽)
이 책의 3부에서는 홀로코스트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타인에 대한 고도의 감성과 높은 감정이입 능력을 보이는 경향"이 있어서, 또 다른 홀로코스트를 막기 위해 특히 동물 권리 운동에 뛰어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이작 싱어도 그중 한 명이다.
동물 학살은 모든 종류의 소수자 차별과 같은 정신에서 기인
ⓒ휴이 책이 주장하는 것처럼 동물 도살 시스템과 유대인 학살 시스템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홀로코스트 경험자가 특별히 동물권 주창자가 많은지는 경험적으로 탐구할 주제이다. 다만 홀로코스트의 희생자인 유대인이나 도살의 희생자인 동물 모두 차별 받는 존재임은 분명한 진실이다. 동물과 비교될 수 있는 존재가 유대인만은 아니다.
PETA 전시회의 또 다른 대상이었던 흑인, 그리고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여타 소수 인종 등 차별 받는 모든 소수자도 동물과 비교될 수 있다. 그중 홀로코스트와 비교되는 것은 유대인과 동물 사이에 대량 학살이라는 역사적인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유대인, 장애인, 동성애자, 집시는 모두 나치에 의해 희생된 소수자들이다.
이 책은 단순히 동물 학살과 홀로코스트에 공통점이 있음을 주장하는 책으로 읽기보다는 동물 학살은 모든 종류의 소수자 차별과 같은 정신에서 기인하고 있음을 주장하는 책으로 읽어야 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째는 홀로코스트와 비교함으로써 본질에서 벗어난 논란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 밥상 위의 홀로코스트' 전시회에서처럼 "어디 감히 유대인을 동물과 비교하느냐?"라고 유대인의 반발을 살 수 있고, 거꾸로 "또 홀로코스트야?"라고 홀로코스트 산업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의 비아냥을 사서 동물 학대의 진실과 차별 논리를 알리려는 의도가 묻혀버릴 수 있다. 둘째는 동물 학살이나 소수자 차별에 공통적으로 담긴 차별 의식을 읽어낼 수 없다면, 차별 받은 당사자들이 차별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또 다른 차별에 동참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는 홀로코스트 경험자는 타인에 대한 고도의 감성과 높은 감정이입 능력이 있어서 동물 권리 운동에 뛰어든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몇 사례일 뿐이다. 홀로코스트와 어떤 식으로든 연관된 사람들이 세운 나라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민족에게 저지르고 있는 숱한 차별적 행태들은 그 몇 사례를 뒤엎는 반대 증거가 된다. 이 책에는 유대인이며 채식주의자인 알베르트 카플란이 한 말이 나온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대다수가 육식을 합니다. 그리고 독일인들이 유대인들의 수난에 개의치 않았던 것보다도, 더 동물들의 수난에 대해 방관하고 있어요. (…) 이는 우리가 홀로코스트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요." (225쪽) 그들이 동물은 물론이고 사람한테 하는 행태를 보면 정말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개탄하게 될 것이다.
차별의 경험에서 차별의 참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또 다른 소수자들에게 그 경험을 되돌리는 분풀이로 이어진다. 그러면 차별의 참된 교훈은 무엇일까? 나치가 수백만 명의 유대인 그리고 장애인, 동성애자, 집시 등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학살할 수 있었던 이유를 생각해 보자. 백인들이 피부색만 다를 뿐이지 같은 인간을 노예로 부릴 수 있었던 이유도 생각해 보자. 그리고 홀로코스트에 학살된 유대인 수보다 학살된 인디언 수가 더 많다는 통계가 있던데, 방문자인 백인들이 오히려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을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생각해 보자.
맹자는 모든 사람에게는 차마 못하는 마음이 있는데 어린아이가 막 우물에 빠지는 것을 보면 모두 놀라고 불쌍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그것이라고 말했다. 맹자의 말씀처럼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런 측은지심을 가질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그러지 못하다. 아무나 때리고 죽이는 사이코패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을 갖기는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자기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에게 한정된다.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에게는 그런 마음을 갖지 않는다. 피부색도 다른 낯선 존재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 존재가 나보다 힘이 약하기까지 하면 노예로 삼고 때리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차마 못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 같은데, 인지상정이라는 말이 사람의 본능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와 다른 존재에게 느끼는 그런 잔인함이 인지상정일 수도 있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윤리적 사고를 위해서는 측은지심 같은 본능적 감정보다 이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동물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람은 나치"
이성적인 사고라고 해서 대단하고 복잡한 것이 아니다. 비록 피부색도 다르고 생김새도 다른 존재이지만, 그들도 나와 똑같이 맞으면 아프고 구속되어 살기 싫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이성적인 윤리적 사고이다. 나도 맞으면 아프고 구속되면 싫고 죽음이 다가오면 두려운 것처럼 그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역지사지이고, 이것이 윤리의 출발이다. 그리고 그 정도 이성적 사고는 누구나 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면 바로 그런 이성적인 윤리적 사고이다. 그런데 소수자로서 차별 받은 경험을 겪었으면서도 또 다른 소수자에게 똑같은 차별을 하는 것은 그런 간단한 윤리적 사고를 하지 못하고, 나도 당했으니 너도 당해보라는 감정적인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이성적 사고는 어디까지 확장되어야 할까? 이 책의 2장에는 인류의 역사에서 차별 받는 사람들을 짐승에 비유하는 사례들이 나온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개, 돼지, 벌레로 취급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낯익은 "짐승 같은 놈"이나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저자의 수많은 사례 중 팔레스타인 율법학자가 유대인을 돼지와 원숭이에 비유하며 복수를 맹세하는 것은, 그 의도는 알겠지만, 좀 불편하다. 이제 유대인은 소수자가 아니지 않은가?) 나와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데는 그들을 나와 같은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짐승과 동급으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아닌 짐승에게는 그렇게 하면 되나? 나와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맞으면 아프고 구속되어 살기 싫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윤리적 사고의 시작이라고 했다. 그러면 동물은 맞으면 아프지 않고 구속되어 살면 즐겁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가? 말 못하는 짐승이니까 알 수 없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유대인이나 흑인은 고통을 호소하지만 힘을 가진 자는 애써 무시한다. '말할 줄 아는 짐승'이라고 치부하며. 갓난아이는 말을 못하지만 우리는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행동으로 안다. 짐승도 마찬가지이다. 인류의 오랜 관찰과 과학적 연구는 짐승이라고 하더라도 (적어도 척추동물은) 맞으면 아프고 구속되어 살기 싫고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을 안다면 짐승에게도 이유 없이 고통을 주거나 가두어 기르거나 두렵게 죽이는 행동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윤리적 실천이다.
나는 맞으면 아픈데 피부색이 다른 사람은 맞아도 안 아플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는 맞으면 아픈데 생김새가 다른 짐승은 맞아도 안 아플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내가 맞을 때 누구에게 항의할 근거가 전혀 없다. 그런 사람은 오로지 강한 사람은 약한 소수자를 때려도 된다는 힘의 논리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힘의 논리를 벗어나서 윤리적 사고를 하게 될 때 홀로코스트나 흑인 노예제의 비윤리성을 주장할 수 있게 된다. 현실은 아직도 시궁창이지만 우리 인류는 적어도 윤리적으로는 그런 차별이 옳지 않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동물에 대해서는 아직도 홀로코스트를 저지르고 흑인 노예제를 시행하던 시대의 힘의 논리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고, 산업화된 공장식 농장이 증가하면서 그 논리는 오히려 더 강화되고 있다. 홀로코스트나 흑인 노예제에는 내가 참여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나 있지만, 값싸게 고기를 먹고 있는 요즘의 우리는 모두 꼼짝없이 '동물 홀로코스트'와 '동물 노예제'의 동참자이다. 그런 현실에서는 "동물과의 관계에서 모든 사람은 나치다"라는 말은 더 이상 은유가 아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홀로코스트나 흑인 노예제는 인류의 잔인하고 부끄러운 과거이지만, 그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묵인했다. '동물 홀로코스트'와 '동물 노예제'도 잔인하고 부끄러운 과거로 남을까?
최훈 강원대 교수 (pedagogy@pressian.com)